#1. "작년부터 조금씩 장사가 되고 있어요. 한진이 잘 돼야 우리 같은 사람들도 먹고 살지요."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공장 정문 앞에서 음식점 '고기야 고기야'를 운영하는 김정옥 씨는 요즘 얼굴이 많이 펴졌다. 한진중공업 앞이기 때문에 손님은 90% 이상이 한진중공업 임직원이다.
8년 전 문을 열 때만 해도 조선업 호황 덕분에 예약을 하지 않고는 점심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하지만 조선업 경기가 꺾여 손님이 뜸해졌고, 2010년 말에는 이른바 '한진중공업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는 임대료 내기도 벅찼다.
이른바 '희망버스'가 찾아올 때는 완전히 공치는 날이었다. 김 씨의 가게 바로 옆에 있는 '한진숯불갈비'는 그 때 문을 닫아 아직까지 영업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한진중공업이 정상화돼 지난해부터 조선소의 크레인 소리가 커지고, 용접 불꽃이 밝아지면서부터는 김 씨의 장사도 점점 회복되고 있다. 김 씨는 "아직 가게가 예전처럼 꽉 차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한결 낫다"고 말했다.
#2. "중공업 회식 손님 받아본 지 오래됐어요. 노사 문제라도 해결되면 좀 나아지려나요."
울산 동구의 현대중공업 정문 쪽에서 해물 음식점을 하는 박모 씨는 시름이 깊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3조원대 적자를 기록하고 잇따라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박 씨의 음식점에도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IMF 때도 손님이 끊이지 않던 곳이지만, 지금은 점심 때 서너 테이블 손님 받기도 힘들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한 임금·단체 협상을 아직 종결하지 못했다. 박 씨는 임·단협이라도 끝나서 임금 소급 인상분과 인센티브 지급 등으로 '돈'이 풀리면 사정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현대중공업은 지난 11일 노사가 제2차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예전만큼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접었다.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고 해도 언제 구조조정 당할지 모르는데 저축부터 하지 지갑을 열겠습니까."
지난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부산과 울산을 둘러보며 체감한 지역경기의 단면이다. 조선업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같은 매출액이라고 해도 그만큼 그 산업에 밥 먹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 '매' 먼저 맞은 부산, IMF 이후 최대 불황 맞은 울산 = 부산과 울산은 각각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 한진중공업과 현대중공업 덕에 조선업 호황 때 덩달아 번영을 누렸다. 부산은 한진중공업이 위치한 영도뿐 아니라 다리 건너 남포동까지 저녁이면 음식점마다 한 테이블 건너 회색 한진중공업 점퍼를 입은 손님들이었다. 울산은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고의 지역내총생산(GRDP)을 기록하고 물가 높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업 불황이 짙어지면서 좋은 시절은 갔다. 하지만 두 도시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부산 영도는 '매'를 먼저 맞은 곳이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상선과 특수선에 특화돼 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상선 분야 불황이 계속되자 일감이 끊겼고, 2010년 말 구조조정 발표 때부터는 노사 악재까지 겹쳤다. 8만여평의 조선소가 텅 비자 지역 상권도 이 때 바닥을 쳤다.
노사 문제가 해결되고 회사가 차차 정상화되자 현재는 조선소에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일감이 늘었다. 유급휴직을 해야 했던 직원들도 95%가 복직했다. 기자가 찾았을 때는 3번, 4번 도크에서 터키 선주에게 수주받은 18만톤의 벌크선 2대 조립 작업이 한창이었다. 특수선 작업장인 2번 도크에서는 500톤급 유도미사일 고속함 '박동진함'에 장비를 장착하는 근로자들이 바삐 움직였다.
배를 수주하면 작업 인력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상선의 경우 선주사 관계자와 감리 인력이 배가 완성될 때까지 함께 머물러야 하고, 특수선은 배를 이용할 군인 등 승조원이 설계 때부터 상주한다. 이들도 여기서 '먹고 자고' 하기 때문에 지역 상권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울산 동구에 있는 현대중공업은 상선 시장 불황에도 해양 쪽의 사정이 좋았던 덕분에 지금까지 큰 부침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저유가로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를 비롯한 해양 설비 수주가 뚝 끊겼다. 여기에 과거 저가로 수주했던 물량은 경영에 압박을 줄 정도로 애물단지가 됐다.
현대중공업뿐 아니라 울산 경기를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축인 석유화학 역시 사상 최대 불황에 직면해 있다. SK에너지 울산콤플렉스(CLX) 스틸렌모노머(SM) 공장을 비롯해 가동을 멈춘 공장도 생겨났다.
여기에 자동차 산업마저 경쟁이 심해지면서 불안감이 쌓이는 상황이다. 이는 지역경기와도 직결된다. 울산외식업협회 관계자는 "식당들이 대부분 매출이 20∼30% 정도 떨어져 있다"며 "조금 더 가면 문 닫는 곳이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밀집된 덕분에 '부자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던 울산이 이제 불황을 겪는 기업들 때문에 급한 침체기에 접어든 것이다.
◇ "지역경제 연착륙, '노사 화합'이 관건" = 두 도시의 차이는 수치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동남지방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월 경제활동참가율과 고용률은 부산이 전년 동기대비 각각 0.8%포인트, 0.4%포인트 상승한 반면 울산은 1.5%포인트, 1.3%포인트 하락했다. 작년 4분기 광공업생산은 부산이 2.4% 증가했고, 울산은 2.8% 감소했다.
제조업 위주의 대기업 경기 불황에 취약한 산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관광 등 소비 산업의 비중을 키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
지역 경제계에서는 그나마 지역 상권이 덜 침체되고 경기가 연착륙을 하려면 노사관계가 안정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울산상공회의소 관계자는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의 노사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지역 상권은 얼어붙는다고 보면 된다"며 "노사관계가 안정돼야 식당 손님도 늘고 외부에서도 더 투자를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부산상의 관계자는 "한진중공업의 경우 노사문제에 따른 사회적인 문제가 인근의 관광객까지 발을 돌리게 할 정도로 지역 경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며 "지금은 노사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것이 지역경기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