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그의 학창시절 전부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중·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최종 수비수로 각광받던 그는 1990년 12월 당시 실업축구팀인 국민은행에 입단한다.
그로부터 25년 뒤, 그는 은행 부지점장이 됐다. 지난해에는 국민은행 노조위원장 문턱까지 갔다. 축구선수에서 뱅커(Banker)로의 변신, 한상만(47) 국민은행 세종청사지점 부지점장의 이야기다.
한 부지점장에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당시 국민은행은 축구단의 해체를 결정한다. 축구만 생각했던 한 부지점장으로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프로팀의 스카우트 제의에도 국민은행에 남았던 그였다. 이때부터 한 부지점장의 변신은 시작된다.
한 부지점장은 축구단 해체와 함께 국민은행 흑석동지점으로 발령난다. 은행원으로서의 업무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은행원으로서 자리를 잡아갈 때쯤 또다시 변신이 시작된다. 국민은행 노동조합에서 자체적으로 축구단 설립을 결정한 것. 2000년의 일이다.
그는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말에 갑자기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그는 결국 은행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마포지점 등을 거치면서 은행원으로서의 변신에 성공한다.
하지만 축구와의 인연은 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손짓을 건넨 것은 기획재정부였다. 정부부처 중 축구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기재부는 2004년 한 부지점장에게 축구 지도를 부탁했다. 기재부 공무원들이 참가하는 축구대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기재부 축구팀과의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매일 아침 6시30분에 경기장으로 가서 기재부 축구팀을 지도하고 있다. 2008년 과천지점에 이어 세종청사지점까지 발령난 이유다. 공무원들과의 관계에 힘입어 2010년에는 국민은행 최고권위의 ‘국은인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 부지점장은 지난해 또 한번의 변신을 꾀했다. 국민은행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한 부지점장은 아깝게 낙선했다. 8명의 후보 중 3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이른바 채널갈등(은행 합병 전 국민·주택 출신 갈등)이 남아 있는 국민은행에서 국민은행 후보 6명 중에는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노조선거 이후 세종으로 오게 된 한 부지점장은 최근 지점으로 승격된 국민은행 세종청사지점에서 정중순 지점장과 함께 새로운 영역 개척에 나서고 있다. 한 부지점장은 “최고의 은행원이 되는 것이 꿈”이라며 “세종청사지점이 전국 최고의 지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