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읍시다.”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보름달이 환한 밤. 이부자리에 함께 누운 남편과 아내. 팔베개를 했을 거 같고, 머리나 얼굴을 쓰다듬다 꼭 끌어안고 ‘운우지정’을 나눌 것만 같다. 장면은 상상이지만, 대화 내용은 실제다. 조선 중기 시대에 살았던 부부가 주고받은 이야기다.
“자네는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고 나는 자네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던가?”
조선 중기, ‘원이 엄마’라는 아내가 이응태라는 남편에게 한글로 편지의 내용이다. 이 편지는 400년 후 1998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됐다. 남편은 임진왜란 6년 전 서른한 살로 요절했다. 역사학자들은 원이 엄마가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남편이 살아있었을 때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리며 쓴 편지로 추정했다.
이 편지가 감동을 넘어 놀라움을 준 이유는 ‘조선 시대 부부’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부부라 하면 남편에게 순종을 요구받는 여인, 삼강오륜과 삼종지도, 칠거지악 앞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여인의 모습이 우선 떠오른다. 남편도 남자 체신을 앞세워 아내에 대한 사랑 따윈 쉽게 내색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 머리에 박힌 이 같은 모습 대부분은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선입견이다. 이른바 가부장제도는 5천 년 역사 중 극히 일부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아들과 딸은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고, 조상의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시집살이보다는 처가살이가 더 많았고, 여자의 재혼(개가), 삼혼조차 흉이 아니었다. 원이 엄마의 편지에서도 나오듯, 부인은 남편을 ‘자네’라고 지칭할 정도로 그들은 ‘평등’했다.
여성사, 장애인사 등 조선 시대 하층민 삶을 알려오던 정찬권 고려대학교 교수는 이처럼 현대와 많이 다르지 않았던 조선 시대의 다양한 부부의 모습을 소개한다.
한국 역사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 퇴계 이황의 사례도 뜻밖이다. 이황의 별명은 ‘낮 퇴계 밤 토끼’였다. ‘낮에 의관을 차리고 제자를 가르쳤지만, 밤에는 부인에게 토끼와 같이 굴었다’고 해서 전해지는 얘기다(한국구비문학대계 재인용). 퇴계는 재혼할 당시, 상대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결혼했고, 결혼 후에도 그런 부인을 끔찍하게 챙긴 ‘애처가’였다.
‘조강지처’에 대한 의리를 지킨 박지원 같은 사례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청빈함을 지켰다. 뒤늦게 벼슬길에 나갔지만, 반년도 안 돼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재혼이나 첩을 두는 일이 흔했던 시대였고, 모두가 권했지만, 연암은 첩조차 두지 않고 홀아비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곧은 성품과 기개가 작용한 결과지만, 고생했던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는 평가다. 아내가 죽은 후 애도의 시를 스무 편이나 지은 게 한 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매 맞는 남편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맞아 죽기까지 해 부인이 감옥에 갇히고 곤장을 맞는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다. 심지어 남편이 여종의 손목을 잡자 여종의 손목을 잘라 남편에게 보낸 무서운 부인도 있었다(금계필담, 99쪽). 중종 12년(1517년) 부인에게 매를 맞아 남편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정 회의에서 임금은 “이러다간 조선 남자의 씨가 마르겠소”라며 걱정을 할 정도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평등하고 ‘소울 메이트’로 부부관계를 맺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죽은 아내의 글(시, 편지 등)을 모아 유고집(정일당유고)을 낸 남편 윤광연, 아내를 위해 유배지에서 한글로 편지를 쓴 추사 김정희의 사례 등이다.
정 교수는 “이들을 조선 시대 부부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유교 문화에서도 ‘멋진 사랑’ 혹은 신랄한 ‘부부 싸움’이 있었다는 점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말했다.
책은 저자가 가상의 인물(기자)과 함께 그 시대로 가 주인공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상상력을 발휘해 재미를 더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모든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다. 어떤 시대든 부부가 평생을 함께 늙어가려면 사랑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하다.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정창권 지음/푸른역사/286쪽/1만5000원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