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힐링’의 시대가 가고 ‘자존’의 시대가 왔다. 지난 몇 년 간 대한민국을 사로잡았던 위로 키워드인 ‘힐링’이 감정을 밖에서 안으로 수렴하는 수동적 태도로 접근했다면, ‘자존’은 숨겨왔던 자신의 내면을 타인의 눈치없이 외부로 드러내는 능동적 몸부림이다. 하지만 2015 대한민국은 여전히 타인의 시선과 댓글에 영향받고 움직인다. ‘허니버터칩’ 사태에서 보듯, 품귀 현상을 빚는 대열에 끼지 못하면 낙오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뒤처짐의 느낌은 자존감 바닥의 일부 세태를 대변하고 있다. 다양성이 요구받는 시대에, 획일성이 지배하는 모순적 상황을 타개하는 일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를 잃고 ‘너’에 기대는 자존 상실의 시대를 조명했다.
#1.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소개팅 앱은 ‘아만다’(우리는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다. 기존의 소개팅 앱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품질’을 보증하지 않은 데 비해, ‘아만다’는 수십 명으로부터 검증 절차를 거친다. 남자(여자)가 아만다 가입 신청을 할 경우 수십 명의 여자(남자)의 평가를 통해 평점 3.0을 넘겨야한다.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재수, 삼수는 물론이고 육수, 칠수까지 도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누군가의 평가가 곧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셈이다.
#2. A씨는 일본 오키나와에 놀러갔다가 허니버터칩의 일본 버전인 갸루비 과자를 보고 겨자 맛을 주문했다. 점원이 간장 맛밖에 없다고 하자, A씨는 “창고에 있는 거라도 달라”며 떼를 썼다. 점원은 “왜 한국 사람들은 겨자 맛의 과자만 찾느냐”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정보가 넘쳐나고 스펙이 중요한 시대에 자기 결정보다 타인의 시선에 영향받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결혼→출산’의 기본적인 패턴을 넘어 사소한 물건 하나 구입하는데도 사회가 은연중 요구하는 ‘표준’과 ‘정답’에 끼워 맞추는 일상이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존은 이제 자신의 용기가 아닌 타인의 검열에 의해 세워지고, 이에 부합하지 못하면 낙오된 인생을 사는 듯한 인상까지 준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상은 다양한 정보를 안겨줬지만, 그만큼 개인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보이지 않은 부작용도 낳고 있다.
타인의 의견이 내 의견이 되고, 다수의 취향이 곧 나의 삶을 반영하는 ‘나를 잃어버린 시대’에 ‘나 자신’을 찾는 행위가 올해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 ‘힐링’ 이후 키워드 ‘자존감’…“흉내내지 말고 자기 신뢰”
“우리가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 될 두 가지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 왜 우리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가. 항상 자기밖에 이미 있는 기준에 견줘서 보기 때문이다.”
“나로 태어나서 나로 죽을 텐데 나니까 살 수 있는 삶을 살텐가, 아니면 앞사람이 했던 것들 흉내내면서 살 것인가.”
지난해 말 유튜브에 게재된 ‘2015 동기부여 영상-나 자신(Be Yourself)’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라고 소리친다. 자신에게 무한 신뢰를 주고, 타인의 삶을 흉내내지 말라는 경고도 서슴지 않는다. 이 영상은 게재 1주일만에 7만명을 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인기있는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은 짐 캐리가 마하리쉬 대학에서 선보인 ‘자신의 신념’을 주제로 한 강연이다. 지난해 12월 국내에 소개돼 50만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지난 2013년부터 힐링 열풍을 이끌었던 혜민 스님이 올해 내세운 키워드는 ‘자존감의 회복’이다. 복잡한 사회, 다양한 정보, 진리 부재의 시대에 ‘개인’을 향해 자존감을 외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짐캐리의 마하리쉬 대학 졸업 축하 강연/사진=유튜브 영상 캡쳐
◇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망친 ‘자존감’…“내 선택 줄고 타인 의견 추종”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자존감 결여를 부추기는 대표적 대상이다. 넘쳐나는 정보에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소위 ‘햄릿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디지털 소스들은 알아서 척척 ‘해결책’을 내놓는다.
‘실시간 검색어’ ‘큐레이션 서비스’(원하는 정보를 선택 전달)를 통해 자신이 전혀 모르는 키워드인데도, 뒤쳐진다는 느낌을 배제하기위해 남들이 관심 갖는 키워드를 이해하려고 하고, 자신의 취향이 아닌데도 남들이 보는 영화와 음악이 ‘보편적 기준’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디지털이 이끄는 특정 서비스는 외관으로는 소비자의 결정을 돕는 역할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비자의 선택을 방해하는 모순적 상황을 유도하는 셈이다.
디지털내 다수 의견은 하나의 획일화된 정답으로 수렴된다. 사용자는 인터넷 접속 후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타인의 다수 의견을 통해 ‘확인’받고, 이를 따라가야 최소한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타인이 추천한 베스트 셀러를 읽지 않거나, 1000만 관객을 모은 대작 영화를 보지 않으면 타인과 소통이 단절됐다고 믿기 쉬운 것도 인터넷 세상이 만들어놓은 새로운 기준이다.
뉴스를 클릭하는 기준은 남들이 많이 본 뉴스, 댓글이 많은 뉴스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뉴스보다 타인이 많이 본 뉴스를 중요한 정보의 원천으로 삼는 셈이다. 김경화(여·28)씨는 “다양한 정보에 선택이 어려워지는 순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갈수록 나의 선택은 줄고, 타인의 의견을 추종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 “의사 결정은 모두 타인에 넘겨”…‘센송합니다’ 신조어 유행시켜
자기 결정권이 약해지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추천’을 부탁하는 글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음식 추천은 기본이고 소개팅할 때 입고 나갈 옷, 아기 이름, 회사 선택 등 일상의 소소한 것 모두가 대상이다.
대학생 배모(여·22)씨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야식으로 주문할 치킨 전문점을 소개해달라고 추천 글을 올렸다. 가장 많은 답변으로 선택한 치킨을 시켜 먹었지만, 맛이 별로였다. 그래도 그는 ‘항의’하지 못했다. 다수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견에 함몰된 자신감 부족은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유행어 ‘센송합니다’를 만들어냈다. ‘조센징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이 용어는 타인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 스펙과 비교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는 우리 전체를 비하하는 의미로 통용된다. 비슷한 말로 ‘똥송합니다’도 있는데, ‘동양인이라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다.
◇ “강화된 ‘사회적 표준’에 기준 맞추려는 강박 심해져”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존감 결여의 사고와 행동이 이어지는데도, 스스로는 대부분 ‘주체적’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정작 뉴스를 고르거나 음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단 댓글 뉴스’나 ‘톱 100 음원’을 취하면서도 그 안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하는 ‘행위’로 합리화하는 식이다.
하지만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성향 테스트가 활발하게 성행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자존감은 높은지 갈피를 잡기 힘든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꼬집는다.
이택광(경희대 영문과 교수) 문화평론가는 “예전에는 우리에 대한 평가가 가족, 친인척 등 좁은 범위에서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인터넷 등으로 확산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사회적 표준’이 강화될수록 기준을 맞추고 평가에 따르려는 강박감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